홍성 노해원님_#2.이벤트 중독자들의 이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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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해원
충남 홍성에서 귀촌생활 중ㅣ세 아이의 엄마ㅣ여자 축구팀 '반반FC'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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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이벤트 중독자들의 이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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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바람 / 복태와 한군(선과 영)

우리가 했던 결혼식에 대충 이름 붙여 보자면 ‘전통 혼례를 빙자한 제멋대로 결혼식’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갑작스레 준비하게 된 결혼식이었지만 마치 오래전부터 함께 고민해왔던 사람들처럼(이것도 누군가의 큰 그림이었을까?) 우리가 하고 싶은 결혼식에 대한 구상을 시작했다. 종이를 실로 꿰매어 청첩장을 만들고, 청첩장에 하나하나 편지를 쓰고, 웨딩사진, 옷과 화장, 행사 진행과 계획을 모두 우리가 도맡아 했다. 틀에 박힌 뻔한 결혼식은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 지나치게 소비 중심적인 결혼 문화를 쫓지 말자는 결심. 주변에 재능 있는 사람들이 많으니 그들과 함께라면 뭐든 할 수 있다는 이유 모를 자신감. 결혼식을 준비하며 자연스레 갖게 된 생각들이 우리를 더 바삐 움직이게 해주었다.

 

넘치는 패기에 비해 어쩔 수 없이 넘지 못했던 부분도 있었고, 그때는 남편도 나도 어려서 챙기지 못한 많은 부분들이 아쉬움과 미안함으로 남는다. 하지만 몸도 마음도 크게 다친 사람 없이 무사히, 아주 즐겁게 끝냈으니 우리는 그것만으로 아주 만족이었다. 무엇보다 결혼식 전날 비좁은 1.5룸 자취방에 양가 식구들이 모두 모여 율동 연습을 하고 술을 마시며 놀다 뒤엉켜 잠들었던 순간들이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우리에게 큰 버팀목이 되었다. 어쨌든 그렇게 고무신 신고 도시를 누비던 여자와 머리를 허리까지 기르며 전 세계를 누비던 남자의 사서 고생 결혼식이 성황리에 잘 마무리되었다.

 

우리 생에 가장 큰 이벤트를 잘 마무리 하고 나니 왠지 모를 자신감이 차올랐다. ‘다음엔 더 재밌게 할 수 있을 것 같은데…’하는 생각이 마음 한구석에 남았다. 그러다 불현듯 큰 아이가 태어난 지 1년이 되었고, 우리는 또 자연스레 아이의 돌잔치를 기획하기 시작했다. 큰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완주로 내려와 살고 있었으니 완주에 살게 된 지도 1년쯤 됐을 무렵이다. 마침 전주 청년몰에 친구들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그곳에서 작은 식당을 하던 친구를 필두로 음식과 장소가 해결됐고, 결혼식 때와 마찬가지로 재주 많은 친구들과 가족들을 동원했다. 이곳저곳에서 달려와 준 친구들은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다 알고 있다는 듯 알아서 척척 움직여 주었다. 그런 친구들을 보며 우리는 지금 축하 이상의 큰 지지를 받고 있다고 느꼈다. 그 어떤 선물보다 아름다운 선물이었다. 우리는 이런 선물 같은 인연들을 자꾸 보고 싶고 자랑하고 싶어 사서 고생 이벤트를 자꾸 벌이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이벤트 병은 범위를 넓혀 지역으로 뻗어나갔다. 우리 마을, 우리 지역 사람들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이벤트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 그즈음 남편과 나, 그리고 나의 단짝 친구 셋이서 청년모임 '다해바' 활동을 하고 있었다. 구성원의 이름 앞 글자를 따 모임 이름을 '다해바'로 정하고 '자유롭게 무엇이든 다 해보자'라는 뜻을 담고 있었다. 스무 평 남짓한 텃밭을 함께 경작하고, 같이 음식을 해 먹고, 공부도 했다. 활동이라 하기엔 아주 사소했지만 그게 우리의 목적이기도 했다. 더 사소하고, 그렇기에 더 자유롭고 내밀했던 모임. 우리 셋은 여러모로 죽이 잘 맞았는데 특히 잘 맞는 것은 음주가무를 사랑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다 어느 날 자연스레 지역에서 락 페스티벌을 열어야겠다고 의기투합했다. 이곳저곳을 들쑤셔(기획서를 내고 설득하고 도움을 요청하고 등등) 지역 시장에서 200만원의 예산을 얻었다. 지금 생각하면 턱없이 적은 예산인데, 그때는 그것도 감지덕지였다. 그 돈으로 낮에는 프리마켓을 열고 저녁에는 락 페스티벌을 했다. 무엇보다 우리는 락 페스티벌을 열었을 때 흔한 동네 음악회로 보이고 싶지 않다는 포부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 지역에 실력 있는 뮤지션들을 수소문하고 어디선가 옷깃만 스쳤던 인디 뮤지션들에게도 염치 불문 구구절절한 사연까지 보내며 열심히 섭외했다. 결과는 꽤나 성공적이었고, 남녀노소 다양한 지역 사람들이 밤늦도록 함께 뛰어놀았다.

 

지금도 나는 여전히 이벤트 중독자의 삶을 이어오고 있다. 여전히 조금의 가능성만 보이면 달려들어 친구들과 마을에서 공연, 전시, 잡지 만들기 등을 기획한다. 내가 좋아하는 것, 우리가 함께 할 수 있는 것들을 최대한 우리답게 만들어 가고 싶다. 허례허식 없이 진심을 담는 일들을 계속 만들어 가고 싶다. 지금까지 내 삶엔 풍요보다 가난이라는 단어가 더 어울리는 삶을 살아왔던 것 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족함을 느낀 적은 없다. 그것은 아마 우리가 이렇게 일궈온 이벤트들로 인해 가난 속에서도 풍요롭게 살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배울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앞으로도 그 진심이 닿는 곳. 그곳에서의 풍요를 배우고 느끼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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